사회

HOME > 뉴스 > 사회

[단독] “광주 유혈사태” 서울서 알리다 체포… 고문 후유증 지금도 고통 <'41년째 죄인' 5·18 기소유예자>

작성일 : 2021-05-18 12:23

 

입력 : 2021-05-18 06:00:00 수정 : 2021-05-18 08:28:56

 

(상) 첩보작전 같았던 5월의 그날

당시 포고령 위반으로 수감된 안평수씨
한은 근무중 광주일고 동문들과 뜻모아
진상 담긴 검열 前 동아일보 1면 입수
외신 기사도 함께 번역해 유인물 배포
신군부에 80년 7월초 줄줄이 잡혀가

군부, 정치인·기자와 엮으려다 실패
결국 혐의 못찾고 두달 뒤에 풀려나
“광주서 고생한분 비하면 아무일 아냐”

1980년 7월3일. 여느 때처럼 한여름의 열기가 아침부터 길바닥을 데웠다. 한국은행에 근무하던 31살 안평수씨는 목에 차오르는 땀을 훔치며 본관에 들어섰다. 이 건물 5층에는 130㎡(약 40평) 넓이의 조사1부 국제수지과가 있었다. ‘그 일’만 아니면 이날도 연구실처럼 고요했을 터다. 안씨가 사무실로 들어서는 찰나 양 팔이 홱 낚이면서 뒤로 꺾였다. 사무실이 비명으로 가득찼다. 고개를 들어보니 점퍼 차림의 건장한 남성 두 명이 안씨를 결박하고 있었다. ‘이제야 잡혔구나…’ 오전 9시30분이었다.

안평수 선생님. 이제원 기자

서울남부경찰서(현 서울금천서) 소속 경찰은 고문에 이골이 나 있었다. 안씨를 무릎 꿇릴 땐 반드시 다리 사이에 각목을 끼워넣었다. 한 시간만 흐르면 무릎 아래로는 죽은 듯 감각이 사라졌다. 경찰은 경찰서 지하에서 각목을 휘두르면서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유인물 제작비는 어디에서 났어”, “배후가 누구야” 안씨는 침묵했다. 구타와 고문이 한 달 가까이 지난 7월31일 안양교도소 독방에 구속수감됐다.

 

신군부는 광주 현지 소식이 서울 등 다른 곳으로 전파되는 것에 예민했다. 언론사마다 검열관을 배치해 보도를 첨삭했고 모든 정보는 유언비어로 규정, ‘포고를 위반하는 자는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수색하며 엄중 처단한다’고 경고했던 터였다. 그런데 5·18민주화운동 발발과 거의 동시에 광주 참상을 담은 신문 1면과 AP, AFP, 슈피겔 등 외신 번역본이 서울에 뿌려졌다. 신군부는 정치권·언론계가 연루된 사건으로 의심하고 검거 경찰에 특진을 내걸었다.

경찰은 서울역과 을지로, 명동, 대학가 등에서 집중 살포된 유인물을 한 달여간 추적해 꼬리를 잡았다. 수사는 결국 인쇄물 원본과 인쇄비를 건넨 상선을 추적하는 데 집중됐다. 인쇄비를 마련하고 유인물을 대학생들에게 전달한 광주일고 동문 이충래·김정철·이영언·임형재씨 등이 차례로 경찰에 검거됐다. 안씨에 앞서 붙잡힌 이충래(당시 31세)씨는 “경찰이 남부서 지하로 끌고 가더니 수갑으로 벽에 묶어놓고 짐승처럼 패기 시작했다”면서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가 난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 사건을 ‘광주일고 불온유인물 제작살포사건’으로 규정했다. 경찰은 이들이 광주일고-서울대 출신이란 공통점을 지녔고 동아일보 검열 전 초판을 뿌렸다는 데 촉각을 세웠다. 신군부와 경찰은 안씨 입을 여는 데 애를 썼지만 수사는 진척되지 않았다. 주동자가 안씨였던 데다 한 달 이상 고문을 해도 동아일보 초판, 외신 등의 입수 경로를 불지 않고 버텼던 탓이다.

안씨는 어떻게 현지 소식을 접하고 언론사 내부 정보를 입수했을까. 안씨는 “지금도 얘기할 수 없다”고 입을 닫았다. 다만, 광주 현지 참상을 정확히 알 수 있었던 건 한국은행에 근무한 덕분이었다. 한국은행 광주지점에서 5월18일 당일부터 텔레타이프로 계엄군의 만행을 수시로 보고했다. 외신 기사는 안씨가 직접 번역했다. 인쇄비는 광주일고 동문들이 갹출해 마련했으며 인쇄물은 이른 아침 버스 차고지에 주차된 버스 지붕에 올려 시내에서 뿌려지도록 했다. 안씨는 당시 고문으로 무릎 연골이 깨졌다.

죄수번호 5050번. 경찰 조사가 무위에 그치자, 재판도 받지 못한 채 안양교도소로 수감됐다. 형이 선고된 기결수냐 미결수냐에 상관없이 당시는 교도소와 구치소를 구분하지 않고 잡아 넣었다. 안씨는 “일단 안 맞으니까 천국 같았다”고 회고했다. 불행 중 다행인지 안씨를 담당한 군검찰 법무관이 죄다 안씨의 서울법대 선후배였다. 1980년 9월4일, 군검찰이 기소유예 처분했고 안씨는 두 달 만에 세상을 마주했다. 신군부 핵심 인사는 안씨 석방 소식을 듣고 “악질이 나간다”며 길길이 뛰었다고 한다. 원래는 군사법원에서 징역 15년 정도 선고하려 했다는 것도 그때 들었다.

 

안씨 주변은 초토화됐다. 아내와 여동생은 다니던 언론사(각각 한국일보, 코리아헤럴드)에서 해직됐다. 2002년 국가보훈처가 민주화 유공자로 신청하라고 통지했지만 거절했다. “광주에서 죽고 고생한 분들이 얼마인데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언론에 대한 특별한 마음이 한켠에 있어 한겨레신문 창간위원(33명)에도 이름을 올렸다. 지난해 들어서야 민주화 유공자 등록을 하고 군과 민간 검찰에 재기수사를 신청한 데 대해 “이제는 제대로 된 법치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